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경종 독살설 (문단 편집) === 독살 부정론 === 우선 [[게장]]과 [[감]]은 당시에도 나쁜 음식 궁합으로 취급받았으나, 인체에 해롭다는 속설은 과학적으로 근거가 없는 이야기이다. [[http://www.newstof.com/news/articleView.html?idxno=1747|먹으면#.]] 따라서 경종의 사인이 게장과 감일 확률은 낮다. 또한 인삼을 처방하는 것에 대해 영조와 어의의 의견이 서로 갈리긴 했지만, 문제는 어의가 별로 실력이 없었다는 것이다. 툭하면 이 약 처방하다가 다른 약 처방하는 식으로 말을 바꿨고 자신의 의술만을 최고라고 주장하였는지라, 실록에서도 "그렇게 잘났는데 왜 임금께서 여전히 골골대고 효험이 없음?"이라고 적으며 비아냥댈 정도였다. 다만 영조 역시 어느 정도 문제가 있었다. 전문가도 아니면서 어의가 내린 처방을 무시하고 멋대로 상극인 처방을 강행한 점이다.[* 이때는 사상의학을 지은 [[이제마]]나 맥론을 지은 [[정약용]]처럼 의학을 전문으로 하지 않은 유학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의술에 대한 저서를 남기거나 약 처방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의학이 철학에 가까웠기도 하지만, 의사가 배타적인 권한을 행함은 근대에 와서 [[면허]]가 등장하면서이다. 당연히 면허제도가 없던 그때는 의학에 접근하기가 훨씬 용이하였다. [[세종(조선)|세종]]도 아우인 [[성녕대군]]이 위독할 때 의서를 읽으며 약을 처방했다는 기록이 있다.] 심지어 "내가 의술은 몰라도 [[인삼]]과 [[투구꽃|부자]]가 기운을 되살아나게 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경종은 사망하였다. 그렇지만 이는 끽해봐야 영조의 '실책'이지 독살설을 제기하기는 조금 무리가 있다.[* 이 때문인지 노론이 기록한 저술에는 어의 이공윤이 인삼차를 먹이면 안 된다고 반대한 내용 자체를 삭제해버렸다. 하지만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데다 경종실록은 물론 사망 당시에 기록된 승정원 일기에도 동궁이 그렇게 처방했다는 내용이 그대로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의심만 더욱 증폭시키고 말았다.][* 정확히는 이공윤의 인삼차 반대 운운의 내용은 경종실록에 기록되었으나 훗날 실록의 편파성을 주장하며 노론측에서 주도하여 편찬된 경종개수실록에서는 이 내용이 삭제되었다. 이러니 의심을 안 할 수가 있나...] 또한 이 부분이 과연 영조의 실책인지도 생각해봐야 한다. 의원 이공윤이 반대한 인삼차는 영조가 언급하기 이전에도 경종이 처음 증상이 나타났던 7월 무렵부터 이미 지속적으로 처방되었으나 이공윤이 반대하여 처방을 잠깐 멈추고 계지마황탕을 올렸다. 그러나 처방된 [[마황]]은 교감신경을 항진시키는 [[에페드린]]이 주 성분으로 한의학에서 계지와 함께 쓰면 땀을 크게 낸다고 알려졌다. 탈수가 심해서 허덕이는 사람에게 발한제를 먹임은 상식적으로 옳지 않다. 또한 한의학에서도 이미 [[상한론]]에서 설사를 하는데 마황을 써서 생기는 부작용과 마황을 지나치게 써서 탈수 증상이 왔을 때의 부작용이 수없이 경고하였다. 실제로 기록을 보면 경종이 이전에는 의식이 있었는데, 이공윤의 주장대로 인삼차를 끊고 계지마황탕을 올린 직후에 바로 혼수상태에 빠졌다. 이런 상황에서 영조가 위와 같은 발언을 하고 인삼과 부자를 올린 이후에 경종은 잠시 의식을 회복했다가 곧 승하하고 말았다. 그리고 인삼과 부자가 과연 틀린 처방인가도 생각을 해봐야 하는데, 인삼과 부자는 한의학적으로 상극도 아니고, 인삼과 부자만으로 이루어진 처방도 영조가 임의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이었다. 인삼과 부자로 달이는 삼부탕은 13세기 진자명이 편찬한 <婦人大全良方>에 처음 언급된 처방으로, [[동의보감]]에도 수록되었다.[* 내경편 진액문 자한 "治陽虛自汗. 人參 五錢, 附子(炮) 一兩. 右剉, 作三貼, 薑 三片, 水煎服." ] 지나친 탈수 등으로 인하여 신체의 기능이 떨러져 땀이 지나치게 나오거나 설사를 지나치게 할 때 쓰는 처방으로 기를 돋우고 진액을 생성하는 인삼과 (한의학에서 양기라고 부르는) 신체 기능을 크게 항진시키는 부자가 쓰였다. 지나친 탈수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진 경종에게는 효과적인 처방이었지 독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이공윤의 배경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의술이 신비하다는 소문을 듣고 숙종대에 귀양살이를 하던 와중에 초빙된 사람이었다. 또한 경종이 죽은 그 해에도 진찰시에 여러 번 불참하거나 지각하여서 벼슬을 삭탈당할 뻔하고, 성품이 매우 불량한데다가 과하게 강한 약을 많이 썼다는 기록 또한 존재한다. 이러한 사람이 경종의 죽음 직전에 상식에서 크게 벗어난 처방을 한 뒤 상태가 더 위중해지자 영조가 나서서 그를 막은 것일 수도 있다. 더군다나 영조의 정치적 입장에서도 경종이 죽어봤자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자기가 의지할 수 있는 기반세력이 탄탄하다면 모를까, 소론이 득세하는 와중에 자신을 끝까지 보호해준 경종을 스스로 죽이면서까지 왕이 될 이유는 없으니까. 게다가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와중에 어의가 한 처방을 뒤집으면서까지 인삼차를 처방한 것은, 그만큼 영조가 경종의 죽음를 바라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경종은 이미 가망이 없을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지라, 상식적으로 그냥 내버려둬도 죽을 사람을 일부러 이목이 쏠린 상황에서 독살할 정도로 영조가 어리석지는 않았다.[* 영조가 초조한 나머지 충동적으로 저질렀다고 볼 수도 있겠다. 허나 왕이 쓰러진 상황에서 적법한 후계자인 영조를 적들이 공격하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잘못하면 후대에 군주의 안위를 등한시하고 자기들의 권력 싸움에만 몰두한 간신이라고 공격받을 수도 있다.] 영조가 처방한 약을 먹고서도 임금이 끝내 절명했다면 영조에 의한 독살설이라는 낭설을 피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실제로도 영조는 이 음모론 때문에 평생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다. 굳이 독살을 하고 싶었다면 병세의 차도를 보고 회복될 기미가 보일 때 드러나지 않게 함이 합리적이다. 더군다나 자신을 옹호해줄 세력이 미미하다면 자칫 이를 빌미로 쿠데타 같은 반정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데,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굳이 인삼차를 권한 것은 그만큼 경종이 살아나길 원하는 점이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영조 입장에서는 독살이라는 위험한 도박을 저지르면서까지 적들이 가득한 조정에서 왕 노릇을 할 바에야 경종이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기반을 제대로 만들고[* 영조는 노론 신하들이 야밤에 경종을 찾아가 협박하여 세제로 책봉되었다. 사실상 후계자라고 할 사람이 영조 외에는 없기 때문에 그냥 기다려도 되는데 굳이 이 행태를 벌인 것. 세제로 책봉된 후에 [[삼수의 옥]] 때 역모에 얽혔기 때문에 독살설이 없어도 왕위 계승에 시비가 붙을 상황이었다. 그러니 세제로 좀 더 지내면서 경종에 대한 충성과 우애를 증명하여 이미지를 회복할 필요가 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영조 개인의 입장에서도 더욱 편했던 것이다. 여기에 [[계유정난]]과 비교해서, "어차피 왕이 되면 끝나는 건데 영조가 도박을 할 수도 있지 않느냐?"라고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세조와 영조는 처한 상황이 180도 달랐다. 세조는 [[단종(조선)|단종]]이라는 제대로 정통성을 갖춘 왕이 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건달들을 불러모아서 정적들을 제거하는 쿠데타를 벌여서 결국 왕위를 받아냈다. 반면 영조는 효종의 정통성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던 경종에 의해 후계자로 세워진 상황이라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정적이 아닌 보호자였다.[* 경종이 제대로 보호해 주지 않았다면 영조는 [[삼수의 옥]] 때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 괜히 영조가 '황형께서 날 살려준 건 전례가 없는 일이다.'라고 말한 게 아니다. 경종이 생전에 영조를 낀 노론에게 받은 수모와 모욕을 보면 이때 영조를 죽여버리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